낙서장

아까시나무 1부, 봄과 아카시아 10.

inKrain 2022. 9. 25. 21:33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학교에 오시게 할 수는 없었다. 너에게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옆자리에 앉은 반장이 항상 방해하였다. 반장은 나를 수차례나 너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나를 끌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나랑 린은 아주 바쁘니까 방해하지 마.”

 

반장은 이제 나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어른 같은 표정을 그만두고 나를 죽은 바퀴벌레 사체 보듯이 위아래로 훑어보고 자리로 돌아갔다.

 

적의를 숨기지 않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녀석에게 복수하고 너를 되찾을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친구도 한 명 없는 왕따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장이 소문을 냈는지 내가 너를 쳐다볼 때마다 아이들이 수군댔다. 일진들은 나에게 온갖 조롱을 했다. 초조해하는 사이 어느새 마지막 교시만 남아있었다.

 

마지막 교시는 국어 시간이었다. 책 읽기 귀찮아하는 선생은 언제나 아이들을 시켜 교과서를 읽히게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교과서를 읽힐 아이를 찾고 있었다. 다들 이 시간을 제일 싫어했다. 나는 이때 손을 들어 내가 읽겠다고 이야기했다. 교실의 시선은 내게 모였다. 나는 너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너의 옆에 앉은 반장은 여전히 나를 깔보고 있었다.

 

, 웬일이야. 그래 그럼 네가 읽어봐. 자자 모두 친구가 읽는 것을 집중해서 들어주자.”

 

나는 심호흡을 했다. 뒤는 생각지 않았다. 내게 남은 시간이 없었다. 더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선생님, 그리고 애들아. 내 이야기를 들어줘.”

 

교과서가 아닌 다른 말이 나오자 비로소 모두가 내 목소리에 집중하였다.

 

거짓말쟁이는 내가 아니라 반장이야. 나는 린을 괴롭힌 적 없어. 그건 린,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너희 모두 반장한테 속은 거야. 반장의 거짓말에 내일 우리 부모님이 학교에 오게 생겼어. 처음은 이산, 이번엔 나, 다음은 누구일지 나는 몰라.”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반장은 당황한 듯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리 질렀다. 반장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다. 너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너에게 웃어주었다.

 

모두 조용!”

 

선생의 말 한마디에 교실은 조용해졌다. 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가능한 한 큰 목소리로,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은린, 우리가 정말로 친구라면, 나를 위해서 진실을 말해줘. 나는 너를 괴롭힌 적이 없다고. 반장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조용히 하랬지! 우준, , 그리고 너는 잠시 나와봐.”

 

우리는 조용히 선생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우리가 나가자 교실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야 당연하다. 내가 모두의 앞에서 이렇게 크게 말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선생은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너에게 물었다.

 

린아,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혹시 정말로 아까 쟤가 말한 게 사실이니?”

 

너는 나와 반장의 눈치만 보았다. 나는 네 맑은 눈동자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 어서 말해, 내 말이 맞다고. 어제 돌아가면서 쟤 때문에 힘들다고 그랬잖아.”

 

반장은 네가 입을 열지 못하자 재촉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점점 짜증이 섞여갔다.

 

왜 머뭇거리는 거야. 어서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해.”

 

나에게만 짓던 얼음보다 차가운 표정을 보자 너는 더욱 주눅이 들었다. 그 모습에 반장은 더 동요했다.

 

우리가 정말로 친구라면 진실을 말할 거라고 믿어.”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너는 조용히 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게. , 저딴 녀석 말은 신경 쓰지 마.”

 

반장의 말은 점점 격해졌다. 아이들은 문에 달린 작은 창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 다 조용히 해! ,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해 주렴.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거니.”

 

그제야 반장은 원래 얼굴로 돌아왔다. 한 방 먹인 것 같아서 괜히 뿌듯했다. 너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설령 나를 외면할지라도.

 

선생님, 우준이가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우준이의 잘못이 아니라

 

!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저 잡종이 뭐라고 나를 배신해. 분명히 그랬잖아. 어제 이야기하다가 울었다고.”

 

반장은 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너에게 화를 냈다. 사실 자백한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반장은 그 정도로 간단한 판단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을 잃었다. 나는 네게 달려드는 반장을 몸으로 막았다.

 

반장, 설마 지금 여자아이를 괴롭히려는 거야? 나쁜 건 너잖아.”

 

반장은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그 자리에서 내 뺨을 쳤다. 산 녀석의 주먹에 비하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나는 녀석을 뒤로 한 채 선생에게 말했다.

 

선생님, 아무래도 저희 부모님이 아니라 반장네 부모님을 불러야겠죠?”

조용히 해. 이 잡종아. 은린, 네가 이런 아이일 줄은 몰랐어.”

 

순한 모범생의 얼굴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고 분노와 증오의 잔재만이 반장의 목 위로 남아있었다.

 

조용히 하랬지! , 수고했어. 아이들 조용히 시키고 선생님 올 때까지 좀 쉬면서 들어가 보렴. 우준이는 나를 따라와라. 그리고 너는 우준이가 돌아오면 교무실로 오고.”

 

선생은 나와 너를 두고 반장을 데리고 교무실로 갔다. 너는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또다시 구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무리한 부탁 해서 미안해.”

 

나는 너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너는 나한테 의지한 채로 겨우 다리를 움직였다. 너는 거울처럼 괴로움을 나에게 반사했다.

 

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다행히도 너는 이번에는 나에게 대답해주었다. 저번처럼 네가 나를 피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기우에 불과했다.

 

저번에도 나를 구해줬잖아. 외톨이에서. 이번에도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너는 눈물을 그치고 살짝 웃어주었다. 그 너를 처음 본 날, 처음 보았던 그 아카시아 향이었다.

 

우준이는 괜찮겠지?”

 

그 말에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말았다. 너는 왜 그렇게 웃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갑자기 웃긴 이야기가 생각났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너를 이용한 사람조차 원망이 아닌 걱정이 앞서는 너의 순수한 마음에 웃음이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너를 이용한 사람조차 걱정하는 착한 너에게 더는 반장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교실로 돌아오자. 아이들은 순식간에 우리 주위로 모여들었다. 다들 내 말이 진짜였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너는 인파에 둘러싸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했다. 당황해하는 너 대신 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 일단은 자리에 앉아줘.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이야기할게.”

 

그 말에 아이들은 자리에 돌아갔고 나는 천천히 교단으로 걸어갔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내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이토록 많은 관심을 받기는 처음이라 나도 긴장되어 목소리가 목에 막혀서 잘 나오질 않았다. 나는 아이들의 눈을 둘러보았다. 평소에 있었던 혐오와 두려움, 그리고 경멸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 대신 호기심으로 가득한 순수한 어린이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나는 고개를 너에게 돌렸다. 너의 눈동자에 비친 그 형체는 유령도, 모노톤도 아닌 작은 소년이었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알려줘.”

 

나는 아이들의 뜻대로 전부 알려주었다. 믿을지 말지는 전부 아이들의 몫이었다. 난 최대한 사실대로 말했다. 반장이 나에 대한 폭력을 묵인한 것부터 나를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 그리고 겨울 파도 같은 웃음까지. 이야기를 마친 나는 내 구석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의외로 내 말을 순순히 믿어주었다. 아무래도 일진 녀석들이 증언을 해줘서 그런 것 같았다. 반장이 돌아오자 나는 선생을 따라 교무실로 향하게 되었다. 남겨진 너를 반장이 괴롭힐까 봐 걱정되었지만 나는 너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너는 내게 조심히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교무실에 도착한 선생은 나에게 사과부터 하였다. 나를 믿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제대로 알아보지 않아서 잘못했다며 사과하였다. 부모님께도 전화로 오해였다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그 후 수업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긴 설교를 하였다. 아마 이것이 나를 교무실로 부른 이유였던 것 같다. 나는 대충 반성하는 척을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설교가 끝나자 나는 반장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다. 선생은 머뭇거리더니 전부 알려줬다.

 

반장은 교무실로 가는 내내 너와 내가 자기를 모함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기는 결코 아이들을 괴롭힌 적이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모님께 알리겠다고 말하자 겁에 질려 사실대로 전부 실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싫은 이유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장은 학기가 끝날 때까지 정학처분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전부 알려줘서 고맙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물론 전혀 고맙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당연히 내가 알아야 할 것을 안 것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