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나무
오늘 나무에 꽃이 폈다. 무지갯빛 꽃. 아름답게 피더니 십 분도 되지 않아 한 두 송이씩 저물어 갔다.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우리 집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키는 1미터 남짓인 작고 귀여운 나무.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나무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나무의 주인은 내가 되었다. 내게 유일하게 남겨진 할머니의 흔적이다.
할머니는 이 나무를 아주 소중히 여기셨다. 돌아가시기 전 정신이 오락가락하실 때도, 나무에 물을 주고 상한 잎을 꺾고, 가지를 치셨다.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나지 않는 이 나무가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는 할머니께 “왜 이 나무를 이렇게까지 소중히 여기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본인이 죽고, 내가 이 나무를 맡아준다면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나무 이야기를 하실 때만큼은 제정신으로 돌아오시는 할머니셨다. 나는 식물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호기심이 더 앞섰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기대했다.
“내가 이 나무를 왜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보느냐고 물었잖니. 그 대답을 해주기 전에 이 나무에 깃든 전설부터 알아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나무에는 가끔 죽은 자의 넋이 깃든단다. 이 나무도 그런 셈이지.”
“흔히들 이야기하는 저주받은 나무니, 신목이니 하는 나무들도 모두 넋이 깃들었기에 그렇게 신기가 있는 거란다.”
“이 나무는 본래 묘 앞에 자라던 나무였어. 처음부터 이렇게 화분에 담긴 게 아니었다는 거지.”
“본래는 장영실 선생의 묘 앞에 자라던 작은 나무였단다. 언제부터 자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할아버지, 그러니 네게는 고조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그 나무를 집으로 가져왔지. 그때 할아버지가 담으신 화분이 이 화분이야.”
“할아버지가 이 나무를 처음 봤을 때, 무지갯빛 꽃이 피고 있었다고 그러셨지. 마침 집을 꾸밀 관상목이 필요하셨던 할아버지는 다음날 삽과 자루를 가지고 다시 묘 앞에 찾아갔는데, 무지갯빛 꽃은 모두 사라지고 조그만 무지갯빛 열매가 맺혀있었다고 하는구나.”
‘네 고조할아버지는 그 열매를 손으로 땄고, 그 순간 어느 남자의 형상이 나무 위로 나타났다고 하는구나. 그분은 열매를 먹고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사라지셨다.”
“그 후로 이 나무는 우리 집안의 가보가 되어 대대손손 관리를 하게 되었단다.”
나는 할머니가 들려주신 전설에 대한 의문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진지한 말투와 표정에 차마 여쭤볼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이렇게 여쭸다.
“그럼 할머니는 이 전설을 믿으시는 건가요.”
“그럼. 거짓말 같으냐? 그렇지만 나도 무지개 열매를 보았단다.”
예상치 못한 할머니의 대답은 나를 당혹게 만들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 분이 진지한 얼굴로 말씀하시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럼 할머니도 소원을 비셨나요?”
“물론이지.”
“무슨 소원인데요? 이루어는 졌나요?”
“그럼 이뤄졌지. 네 할아버지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빌었단다. 그래서 시골 처녀였던 내가 잘 나가던 너희 할아버지랑 이렇게 아이도 낳고 손자도 본 게 아니겠니.”
“이제 나무의 비밀도 알았으니, 이 나무를 부탁하마.”
그날 이후 할머니께서는 다신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나는 나무를 부탁한다는 말이 꼭 할머니의 유언으로 들렸다. 그러나 그 전설에 대해서는 사실 믿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오늘, 내가 이 나무를 돌보기 시작한 지 9년이 되어서야 드디어 꽃이 피었다. 고조할아버지가 보았다는 무지갯빛 꽃송이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의 말씀이 진실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꽃송이가 모두 지고 나무에 작은 무지갯빛 열매가 맺혔기 때문이다.
열매는 무지개색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떼고 싶어도 떼지 못하게 만든 이 대추 알 만한 무지개 열매는 나에게 자기를 따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 홀린 듯 손을 뻗어 열매를 집었다. 그 순간 줄기가 떨어져 무지개 열매는 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자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남자의 형상이 내 눈에 나타났다
.
“소원을 정했으면 열매를 먹고 하늘을 바라보고 소원을 이야기하거라.”
그 말과 함께 남자의 모습은 사라졌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갑자기 소원이라니 난감할 뿐이다. 평범한 일상에 불쑥 찾아온 비일상이 미웠다. 그로부터 며칠은 소원을 고민하느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느 소원을 빌어도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아서 보다 완벽한 소원을 찾고 싶었다. 어떤 소원을 생각해도 그것보다 나아 보이는 소원이 다시 떠올랐다. 이 고민은 어느새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고,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이런 나무를 남겨주신 할머니가 미웠다.
바닥에 누워 소원을 고민하다가 무언가가 발을 간질이었다. 나뭇잎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고민에 빠져 나무를 챙기지 못했다. 나무는 못 본 새 생기를 많이 잃어버렸다. 그 옆에 둔 무지개 열매도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소원을 정하였다.
나는 열매를 조심히 베어 물었다. 마지막 한 입까지 먹은 후,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내 소원은요, 내가 소원을 빌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오늘 저녁에 무지개가 떴다. 일곱 빛깔 무지개. 아름답게 뜨더니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색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