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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장

아까시나무 1부, 봄과 아카시아 完.

 교실로 돌아오자 아이들은 눈에 띄게 변해있었다. 아이들은 더는 나를 증오와 경멸의 눈동자로 보지 않았다. 내가 받던 조롱과 비난은 모두 반장에게 쏠렸다. 반장은 죽어버린 시체처럼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몰락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가져 버린 것 같았다. 반장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런 반장을 지나쳐 너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반장이 너한테 나쁜 짓은 안 했어?”

 

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은 여전히 눈에 초점이 나가 있었다. 자리에 앉으라는 선생의 말에 아이들은 그제야 모두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내 구석으로 돌아갔다. 여느 때처럼 바라본 창문에는 처음 보는 미소를 지은 소년이 낯설기만 하였다.

 

집으로 가기 위해 책가방을 다 싸자,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방학이 다가올 시점에 비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산을 챙겼을 리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비에 맞지 않으려 운동화 끈을 조였다.

 

이 우산 같이 쓰지 않을래?”

 

고개를 들자 작은 접이식 우산을 든 작은 손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산 녀석에게 뺏겼었던 내 우산이었다. 고개를 더 높게 들어보니 네가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산 녀석이, 내가 지키고 싶었던 너의 아름다움이었다.

 

고마워. 우산도, 너도.”

아냐, 신경 쓰지 마. 우리는 친구잖아.”

 

말없이 너와 단둘이 교정을 걸어나갔다. 내 심장이 얼마나 빠르게 뛰었는지는 넌 평생 모를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는데,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다.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또 너였다.

 

우준이 일은, 미안해. 너를 더 믿었어야 하는 데.”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 했는데, 사과를 받아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사이가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

 

괜찮아. 그래도 마지막에는 나를 믿어줬잖아. 그런데 어떻게 반장 대신에 나를 고를 수 있었던 거야?”

 

너는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또 바보같이 곤란한 질문을 했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고마워. 역시 너는 착한 아이구나.”

 

갑작스러운 칭찬에 고개를 들을 수 없었다. 내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고 웃는 너의 얼굴은 빗방울에 난반사되어 세상을 가득 채웠다. 작은 우산 안에서 처음 느껴본 행복의 맛은 너무 자극적이라서 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조용히 정류장까지 걸었다. 말은 없었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진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까지 다사다난했지만, 후회는 없다. 나는 앞으로도 내 손으로 너의 행복과 너의 미소, 그리고 너의 은은한 아카시아 향을 지켜 내리라 다짐하며 너와 발을 맞췄다. 작은 발걸음으로 걷는 하굣길이 너무 빠르게 등 뒤로 사라져갔다.

 

우산 돌려줄게. 내일 또 보자.”

 

너를 보내고, 뒤를 돌아보니 반장이 비를 맞으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런 빛도 반사되지 않아서 그 눈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반장은 처음부터 나를 보지 않았다는 듯이 나를 걸어 지나쳤다. 비에 홀딱 젖은 모습이 불쌍했다. 반장의 영원히 그대로일 것 같던 겨울 바다는 모조리 말라버렸다. 그날 이후, 다시는 반장을 보지 못했다.

 

떠난 반장의 자리는 내 자리가 되었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였던 내 자리는 반장과 함께 사라졌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은 너 혼자가 아니었지만, 내 눈에는 오직 너만이 들어왔다. 더 는 일진 녀석들이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도 나를 피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존중, 내가 원했던 인정은 허무하게도 하루아침 만에 얻어졌다. 사뭇 달라진 학교생활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이 찾아와 버렸다. 그 순간까지도 먼저 말을 걸어준 건 너였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내년에도 잘 부탁해.”

그래.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자.”

 

다사다난했던 우리의 첫 학년은 마지막 인사로 끝이 났다. 언젠가 눈은 전부 녹을 것이고 너를 닮은 계절이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함께라면 분명 매일매일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다. 너의 은은한 아카시아 향에 취한 채로. 유난히 길었던 그해의 장마가 우리를 뒤덮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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