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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공장

스케치북에 만개한 사쿠라꽃을 그리려 해

오늘은 모처럼 붓을 다시 잡는 날이라, 곧 다가올 봄을 그려내려고 해. 아직 크리스마스도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 봄이 그리운 걸 어떡해. 봄의 따스함만이 내게 주었던 온기을 지워낼 수 있을 것 같아. 이 추운 겨울을 혼자 보내기에는 어딘가 허전한 것 같아서, 벽에 봄을 걸어놓으면 조금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

 

라는 마음을 품고도 결국 아무런 그림도 그려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없는 봄을 그리려했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명 저는 당신을 만나지 못했던 봄을 훨씬 많이 보냈을 텐데. 어째서 그 때의 기억을 모두 당신과 함께한 시간으로 다 덮어버렸을까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면, 당신과의 기억을 조금 덜 소중히 여겼을텐 데, 제가 바보같습니다. 당신도 결국은 져버릴 봄꽃이란 걸 알았어야 했습니다.

 

이제 제가 맞이할 봄은 따스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걸 알아버렸습니다. 당신이 없어서라는 뻔한 대답 따위는 집어치우겠습니다. 당신이 없다는 이유는 극복해야 하는 제 상처입니다. 당신이 없다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없더라도 저는 내일을 살아가야하는 운명입니다. 마치 당신이 내일을 위해 저를 놓아준 것처럼 말입니다.

 

분명 따스한 봄은 돌아올 겁니다. 4월이 된다면 벚꽃도 피어나겠죠. 그러나 지금은 그 벚꽃을 볼 때 마다 당신이 생각나고 말 겁니다. 처음 당신을 만난 날처럼, 벚꽃은 눈에도 들어오지도 않겠죠. 다른 점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대상이 그날과 달리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의 당신이라는 점일겁니다. 다시는 벚꽃에 당신을 보는 일이 없을테니깐 말입니다.

 

그럼에도 제 봄은 여전히 시리울 것 같습니다. 당신이 겨울바람처럼 제게 불어온다는 진부한 표현은 내려놓겠습니다. 당신이 없는 겨울도 버틸만 한데, 봄이라고 힘들겠습니까. 다만 예전에 비해서 따뜻함의 정도가 약해질 것 같다는 것이죠. 저는 생각보다 당신이 없는 삶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습니다.

 

벌써 지난 봄을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내 눈앞에 놓인 이 스케치북이 그 증거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저는 이 곳에 당신의 향을 닮은 벚꽃을 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과 처음 만난 그 벚나무를 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한 벚꽃축제를 그리지 않을겁니다. 그 대신 작은 사쿠라꽃 한 송이만을 그려낼 것입니다.

 

사쿠라입니다. 당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작은 사쿠라를 그릴겁니다. 당신은 제게 그런 존재입니다. 언제든 쉽게 지워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당신으로 힘들어 할것이라는 망상은 그만두십시오. 저는 당신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 마음을 채워줄 작은 사쿠라 한 송이면 충분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붓을 잡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그려내지 못했어. 이유를 알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만, 평생 알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