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는지 물어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잘 지내는가를 묻지 않는 이유는 그 말의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잘 지내냐는 말에는 함께한 과거와 멀리 떨어진 현재 그리고 영영 닿지 않을 미래가 담겨있다. 잘 지내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사람과 나의 거리를 확인하는 장치이다. 내가 이 사람에게 이전처럼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어려워서 좀처럼 잘 지내냐는 말을 꺼내질 못한다. 인정하기 싫으니까, 이전 같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으니까. 잘 지내냐고 묻지 않는 건 내 자존심 문제였다.
그래서 너에게 잘 지내냐고 묻는데도 3년씩이나 걸린 것이다. 내 자존심을 내려놓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가, 내 마음이 납득하는 거였다. 다시는 예전의 우리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했다. 너를 이용했을 뿐이다. 네 안부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3년이나 넘는 시간 동안 소식 하나 먼저 안 전해주는 사람의 생사를 왜 궁금하겠는가. 진심이 담기지 않은 안부 인사에 사과할 생각도 없다.
솔직히 네가 잘 못 지내길 바랬다. 그냥 심술이었다. 나를 까맣게 잊어버린 주제에 잘 지내기까지 하면 내가 너무 초라해지니까. 그런데 한 달만에 돌아온 너의 답장은 너무 천진난만한 웃음이 담겨져 있어서 싫었다. 마치 다시 우리가 예전의 우리나 다름없다는 듯한 그 순수한 답장은 내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그 날 나는 조금 취했을지도 모른다. 쓸쓸한 달빛에 취했는지, 아른거리는 과거의 향수에 취했는지, 그냥 너에게 취했는지 네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를 못 알아듣는 네가 당황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헛웃음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간만에 순수하게 웃음이 나왔다. 이제 너무도 달라진 우리의 모습이 재밌어서 2분 정도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냐고 장난을 친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순간이라 마음이 편해졌다. 그야 네가 먼저 교환하자고 한 전화번호인데,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은 어느 순간 내 이름이 전화번호부에서 지워졌다는 것이니까. 너에게는 나는 이제 남일 뿐이다. 완전 남. 그 사실이 재밌어서 어린아이처럼 웃었던 것 같다.
그러자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졌다. 분명 전화하기 전만해도 할 이야기가 한가득이었는데,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남이 되어버린 사람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별로 남지 않아서 30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전화의 화제를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느 친하지 않고 친해질 생각이 없는 사람과 대화하듯이 적당히 네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고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적당한 내 근황을 전할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가 한 마지막 한마디도 ‘잘 지내’라는 말이었다. 물음표 대신 마침표가 붙었긴 하지만.
아직도 네가 잘 못 지냈음 좋겠다는 마음이 남아있긴하다. 이유는 같다. 심술이다. 그러나 이제는 네가 잘 지내나 못 지내나 알 방법이 없다. 우리 앞에 남아있는 건 영영 닿지 않을 미래만이 남아있으니까. 그니까 적당히 못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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