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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너를 기다릴 거야.

 

내일 지구가 멸망할 정도로 거대한 소행성이 충돌한다면,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까. 스파노자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 같아.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데 사과나무 한그루 심는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 너무 가혹한 짓이라고 생각해.

 

분명 사람마다 지구 최후의 날에 하고 싶은 일이 다양할 거야. 누군가는 집에서 시간을 보낼거고, 누군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할 테고,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겠지. 그날은 법도 도덕도 모두 소용이 없는 날이 될거야. 무법천지지. 나는 그럼에도 범과 도덕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어.

 

너는 그날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나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래도 너가 뭘 할지 알아내는 방법이 하나 있어. 바로 너와 함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거야. 나는 마지막 날을 기념해서 처음으로 너에게 편지를 보낼 거야. 너가 그 편지를 읽을거라고 확신하지는 않아. 그래도 난 너에게 편지를 보낼 거 같아. 내일이 없으니까.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나는 너에게 작은 편지를 보낼 거 같아. 너와 만나던 그 곳에서 잠시만 만나자는 짧은 편지를.

 

그리고 그 편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그 장소로 조용히 향활 것 같아. 지구 마지막 날인 만큼 천천히 집에서 걸어 나와 네가 있을 곳으로 향할 것 같아. 가는 길에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던 노래를 들으면서 말야. 마지막 날인 만큼 너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굉장한 아비규환일 게 뻔하거든. 그 보다는 너의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

 

나는 땅을 보면서 너가 있는 곳까지 걸어갈 것 같아. 마지막 순간에 내가 살아가던 땅의 모습을 기억에 남기고 싶었어. 내가 자라고 밟고 지내던 땅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 그렇게 걷다보면 너와 약속 했던 그 장소에 도착하고 말거야. 항상 사람으로 붐비던 그 곳은 오늘만큼은 사람이 나밖에 없을 거야. 마지막 날을 보내기에 적합한 공간은 아니거든. 이곳은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장소니까.

 

그리고 아마도 너도 그곳에 없을 것 같아. 너는 내 편지를 받기도 전에 이미 오늘 계획을 다 짜놓았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행복할 것 같아. 네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거든. 이름 모를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어.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너가 언제 올지 모르니 나는 아마 매 순간 행복할 것 같아. 최후의 순간까지 말야.

 

그리고 최후의 최후의 순간에 너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이곳에 와 줄거야. 너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그러면 나는 아마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고 말 것 같아. 나를 결국 중요하게 생각해 줬다는 뜻이니까. 마지막 순간에는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나는 급하게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어보내겠지. 그리고 고맙다고 이야기를 할 것 같아. 같이 올려다본 하늘엔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고 있겠지만 나는 행복할 것 같아. 마지막 순간에 네가 내 옆에 있잖아. 물론 그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을 잘 못하겠지만, 상관없어. 마지막이잖아.